황룡산 자락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문화예술 공간 넓혀
파주 황룡산 자락에 자리한 한주스페이스에 대해 김한일 회장은 건물이나 사업부터 꺼내지 않았다. 먼저 선친 고(故) 완행 김재현 선생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운동과 공부를 함께하며 국가대표를 지낸 선친은 성공한 뒤에도 형편이 어려운 체육특기생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운동할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싶어 했다. 이는 선친이 30대 때 품었던 뜻이었다고 김 회장은 회고했다. 이를 위해 일하면서 마련한 자금으로 황룡산 아래 땅을 조금씩 모았다. 학교 부지로 쓰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나 학교 설립 계획은 여건이 맞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그렇다해도 땅에 담긴 선친의 뜻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김 회장이 그 뒤를 이었다. 지금은 평탄한 부지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계단식 논이 많은 땅이었다. 진입로조차 변변하지 않았다. 김 회장은 틈이 날 때마다 서울에서 파주로 내려왔다. 자유로가 생기기 전이라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꾸준히 흙을 채우고 나무를 심었다. 이런 성토에만 약 15년이 걸렸다고 했다. 현재 부지의 나무와 식재 상당 부분도 직접 김 회장의 손을 거쳐 나왔다.
땅을 일구는 정성은 자연스레 농사로 이어졌다. 영농법인을 만들었고 김은주 관장과 농작물을 심었다. 수확물은 오랜 기간 동안 보육시설 등에 나눔으로 봉사했다. 김 회장은 “우리가 한 10년, 20년 가까이 배추를 키워서 기부하듯이 그때는 둘이 손잡고 농사 지어서 그거를 직접 고아원에 전해주고 계속 그렇게 지냈다”고 말했다. 수익보다 사람에게 돌려주는 일을 먼저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선친이 땅을 두고 자주 강조하던 말도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의 기억에 남은 말은 “여기에 많은 사람이 들끓었으면 좋겠다”였는데 동시에 황룡산만큼은 훼손하지 않고 오랫동안 녹지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도 내비쳤다. 부지를 개발하려는 업자들의 제안도 적지 않았지만 김 회장은 일언에 거절했다. 황룡산 오솔길 입구에 선친의 유적비를 세우고 산으로 오르는 길을 열어준 것도 부친과 같은 생각에서였다고 김회장은 부연했다. 사람이 많이 찾아오게 하되 산을 훼손해 없애는 개발은 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김 회장의 삶에서 큰 변곡은 선친의 별세가 계기가 됐다. 김 회장은 임종을 지키며 가족을 잘 보살피고 형제들이 우애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장례 뒤 선친의 영정 사진을 두고 사무실에서 사흘을 지내며 생각을 거듭해 결정 후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하나도 안 가져가겠습니다. 모두 동생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세요”
김 회장은 선친의 다른 자산을 자신이 받지 않겠다는 뜻을 그렇게 전한 것이라고 했다. 부인 김은주 관장도 큰 뜻을 가진 그의 선택을 받아들여 유산에 관한 여타 문제는 없었다. 지금의 한주스페이스가 들어선 부지는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농사를 짓고 주변 땅을 일구는 과정에서 김 회장 소유로 정리돼 있던 부분이 많았다고 밝혔다.
재산을 내려놓은 뒤 무언가 모를 허전함은 또 다른 일을 벌이게 한 역동적인 계기가 됐다. 그 일은 베이커리 카페 쟈빠따였다. 관련된 경험도 없었던 대형 베이커리 사업을 10개월 만에 밀어붙였다. 김 회장은 당시 쟈빠따 건립이 자신의 ‘돌파구’였다고 돌아봤다. 이해관계에 얽매이기보다 자신이 오래 가꿔온 땅에서 새로운 일을 해보자는 선택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부지 위에 들어선 무고레·쟈빠따·한주아트스페이스를 근래 ‘한주스페이스’라는 한 이름 아래 묶었다. 김 회장이 전체를 총괄하고 부인 김은주 관장은 한주아트스페이스를 맡았다. 선친이 남긴 뜻을 함께 이어가겠다는 의미도 담았다.
김 관장도 오래전부터 이 땅을 여러 사람이 자유롭게 찾는 공원 같은 곳으로 조성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 됐으면 하는 유지가 이어질 수 있어 의미를 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 관장은 당시 자연 속에서 많은 사람이 행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에 김 회장은 과거 ‘한주농원’으로 불리던 곳을 ‘한주공원’으로 바꿨다고 덧붙였는데 식당이나 카페·전시장을 만들기 훨씬 전부터 사람에게 열어놓는 땅을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의 구상에 문화예술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굵게 더한 이가 최태훈 조각가다. 김 회장은 최 작가를 말하면서 친구라는 관계보다 작가로서의 존경을 먼저 강조했다. 김 회장은 오랜 세월 부지를 직접 가꾸면서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라도 공간 어디에 둬야 할지 늘 고민이 됐다고 했다.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한계를 느꼈는데 반면에 최 작가는 공간을 한 번 보고서도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배치를 읽어냈다며 차이를 평가했다.
선친 별세 이후 김 회장은 쟈빠따를 빠르게 건립하고 여러 일을 한꺼번에 밀어붙이면서 상실감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렇게 집중하고 있을 무렵 최태훈 조각가가 문화적인 큰 틀을 더하면서 한주스페이스와 관계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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